한국 게임 최고의 이야기꾼이 둥지를 틀지 못하는 업계

역사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팬들의 염원이 있었다. 그 염원이 무너졌다.

진승호 디렉터가 이끌던 라인게임즈 산하의 라르고 스튜디오가 해체됐다. '베리드 스타즈'에 이어 개발 중이던 '프로젝트 하우스홀드'는 사실상 공중분해됐다. 진 디렉터와 관련 개발진 다수도 라인게임즈를 떠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소식이 알려진 5일 밤, 진 디렉터는 자신의 블로그에 퇴직 글을 남기며 "노력한 결과가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점이 안타깝고 함께 한 동료들께도 면목이 없다"면서 "무엇보다 기대해주신 분들의 성원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심정을 전했다. 

이어 "수개월 경험을 통해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면서 "좋은 게임이자 이야기로 다시 인사드릴 날이 있기를 바란다"며 아직 게임 개발의 의지를 꺾지 않았음을 알리기도 했다. 왜 좋은 게임을 만들고 떠나가며 사과를 하게 됐을까. 그리고 이렇게 된 배경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 '검은방', '회색도시', '베리드 스타즈'... 그리고 되풀이된 비운

진승호 디렉터는 한국 게임계 대표 이야기꾼으로 불린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사용하는 '수일배' 닉네임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모바일로 출시한 '검은방'과 '회색도시' 시리즈는 오랜 기간 국내 대표 스토리 어드벤처 게임으로 군림했다.

이후 라인게임즈로 둥지를 옮겨 개발한 '베리드 스타즈'는 여전한 역량을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0년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우수상과 기획시나리오 2관왕에 올랐고, 콘솔에 이어 스팀 이식 뒤에도 꾸준한 판매량으로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다. 

국내에서 아직 몇 되지 않는 콘솔 성공작을 만들어낸 팀이다. 이런 라르고 스튜디오의 해체는, 팬들은 물론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첫째로 성공작을 내놓고서도 차기작 개발 중 분해됐다는 것, 둘째로 유독 진 디렉터에게 반복되는 악운이 큰 이유다. 

평가와 실적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베리드 스타즈'
평가와 실적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베리드 스타즈'

'검은방4' 출시 후 당시 EA모바일코리아의 수익 압박으로 팀원들과 이직을 단행했으며, 네시삼십삼분으로 옮겨 '회색도시2'까지 출시한 뒤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이번 라인게임즈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 셈이다.

얄궃은 점은, 게임의 질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검은방 시리즈는 매편 수십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당시 기준 최상위 성적이어서 실적조차 부족함이 없었다. 

'회색도시2'는 전작의 아쉬움을 완전히 덜어냈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네시삼십삼분이 모든 에피소드 일시 구매에 5만 5천원이라는 무리한 과금 정책을 강행하면서 일반 유저들에게 완전히 외면받는 결과가 나타났다. 

바깥의 다른 프로젝트에서 모회사가 실패를 거듭한 뒤, 사업을 축소하거나 방향성을 바꾸면서 개발진이 유탄을 맞는 과정이 반복됐다. 이번 라르고 스튜디오 해체도 예외는 아니다. 원래 '베리드 스타즈'는 라인게임즈가 성공을 자랑하던 게임이었다. 

■ 회사 형편이 바뀌고, 방향이 바뀌자, 모든 것이 바뀌다

라인게임즈의 방향 돌변은 2023년 2월부터 전조가 있었다. 5년간 이어진 적자에 대처하기 위해 판사 출신의 박성민 신임 대표를 선임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4월 배영진 최고전략책임자(CSO), 9월 김민규 창업자 겸 대표이사가 연이어 회사를 떠났다. 배 CSO는 라인게임즈의 전략이었던 '스튜디오 얼라이언스' 구축에 핵심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김민규 창업자 역시 베리드 스타즈 등 PC-콘솔 게임에 힘을 실어온 주인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김태환 전 넥슨코리아 부사장이 신임 부사장에 취임하는 등 새로운 임원들이 합류했다. 그리고 사업 방향성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모바일 게임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재편하고, 트로트 소재의 게임 '트롯스타'처럼 구매력을 가진 새로운 계층을 공략한다. 

라인게임즈의 다른 PC-콘솔 게임들은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매년 적자 규모를 감안할 때 수익 개선도 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회전이 빠르고 기대 고점이 높은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그 시점에서 이미 베리드 스타즈의 성공 사실, 미래 가능성은 고려 대상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사실상 공중분해로 팬들의 안타까움이 커지는 '프로젝트 하우스홀드'
사실상 공중분해로 팬들의 안타까움이 커지는 '프로젝트 하우스홀드'

■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넘어가기에 너무 아픈 게임계 현실

당장 수익이 급한 게임사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사례가 전하는 불안감은 있다. 진승호 디렉터 정도로 결과를 내고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스타 개발자가 안정적인 둥지를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 이것은 게임계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스토리 중심 어드벤처 게임이 큰 수익을 장담할 장르는 아니다. 하지만 개발비가 많이 드는 장르도 아니다. 또 체급이 큰 스토리 작가는 일정 이상의 결과물이 가능하다. 아무리 매출이 적은 장르라도, 그 계열의 최고 권위자는 그에 맞는 성과와 대우를 받는 업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게임이 연구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 

과거 '회색도시2'의 후반부와 결말은 어드벤처 게임 유저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남겼다. 그러나 속편 이야기는 영영 볼 수 없게 됐으며, 그 게임조차 지난해 서비스 종료로 플레이할 길이 막혔다. 걸작 게임의 감동이 확장은커녕 보존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은 조용한 비극 중 하나다.

이야기가 전해지고 발전하는 게임계가 되길 빈다. '수일배'의 이야기가 머지않아 다시 이어지길 바란다. 그것은 한국 게임계의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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